서론
조선은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관료제 사회였고, 그 중심에는 과거 시험이라는 엄격한 선발 제도가 존재했다. 과거는 모든 사대부 지망생들이 거쳐야 하는 공정한 시험 시스템으로 알려졌지만, 현실은 이상과는 달랐다. 권력, 돈, 혈연, 정보, 기술이 복잡하게 얽히며 다양한 방식의 부정행위가 은밀히 자행되었다. 정직과 성실을 이상으로 삼던 사회에서도 출세를 위한 욕망은 규율을 무너뜨릴 방법을 끊임없이 찾았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시험 응시자 수가 급증하면서 시험의 공정성 확보가 점점 어려워졌고, 그에 따라 ‘커닝’과 ‘시험장 내 부정행위’, ‘시험지 위조’, ‘관료 개입’ 등 구체적인 사례들이 사료 속에 자주 등장한다. 이 글에서는 조선 시대 과거 시험에서 발생한 커닝 수법과 실제 부정행위 사례들을 바탕으로, 조선이 그 부정을 어떻게 단속했고, 어떤 사회적 파장이 있었는지를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본론
1. 조선의 과거 시험 제도 개요 – 부정의 여지를 만든 구조
조선의 과거는 문관을 뽑는 문과, 무관을 뽑는 무과, 기술직인 잡과로 나뉘며, 특히 문과가 가장 높은 권위를 가졌다. 문과는 다시 초시(地方初試), 복시(複試), 전시(殿試)로 구성되었으며, 각 단계마다 수천에서 수만 명의 응시자가 경쟁했다.
과거 제도는 기본적으로 ‘공정한 선발’을 원칙으로 했지만, 고위층 자제나 지역 명문가 자손들이 시험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시험 문제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지만, 출제자의 정체나 문제 경향이 소문을 통해 퍼지거나, 출제 위원과 응시자 사이의 사적 관계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고립된 장소에서 글만으로 인재를 뽑는 시험 구조 자체가 ‘정보 비대칭’을 낳았고, 이는 부정행위로 연결될 가능성을 항상 품고 있었다.
2. 과거 시험 커닝 수법 – 조선의 ‘지능형 부정행위’
조선 시대에도 오늘날의 시험장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커닝’ 방식이 존재했다.
기록에 남은 대표적인 수법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답안을 옷에 적기
시험장 입장 전에는 수험생의 신체와 복장을 검문했지만, 완벽하게 모든 부정을 막지는 못했다. 일부 응시생들은 겉옷 안쪽, 소매 속, 버선, 허리띠, 모자의 안감 등에 시문 요약이나 경전 문장을 베껴서 몰래 반입했다.
예: 『일성록』에는 한 응시생이 버선 바닥에 경서 요약을 적은 종이를 꿰매어 넣었다가 발각된 사례가 등장한다. 당시는 발조차 검사하지 않았기에 이 틈을 노린 것이다.
(2) 벼루 바닥 이중 처리
벼루(먹을 가는 도구)의 바닥을 이중으로 제작해, 밑바닥 공간에 암기장이나 문장 샘플을 숨겨 들여오는 방법도 있었다. 이는 ‘수험 도구는 검문 대상이 아니다’는 점을 악용한 수법이었다.
(3) 위조된 글씨와 대필
과거 시험에서는 수험생의 글씨체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미리 문제를 입수한 후 대필 작성을 의뢰한 뒤 글씨를 비슷하게 연습하는 방식이 있었다.
또한, 답안을 대리로 작성한 뒤 수험생이 그것을 그대로 베끼는 식의 부정행위도 실제로 적발되었다.
(4) 시험장 외부와의 비밀 연락
시험 중 시험장 안과 밖을 완전히 차단했지만, 일부 시험장에서는 담장 너머로 비둘기를 이용하거나, 쪽지를 줄로 주고받는 방식이 적발되었다.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의 초시 시험장에서 지역 유지가 시험관과 공모해 외부에서 답안을 전달하는 사례도 있었다.
3. 실제 적발된 부정 사례 – 사료 속의 실명 기록
(1) 1668년 문과 초시 부정행위 사건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경기도 과거 초시에서 한 응시생이 모자의 안감에 〈대학〉의 주석을 적어 넣은 것이 발각되어 장 80대와 함께 응시자격 박탈 처분을 받았다. 문제는 해당 수험생이 고위 관료의 자제였다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이 컸고, 지역 유생들이 과거제의 불공정성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2) 장서각 소장 ‘과거부정 기록문서’
장서각에 소장된 한 문서에는 ‘사대부가 대필 작가를 고용해 초시를 통과시킨 뒤, 복시부터는 본인이 직접 시험에 응시한 사건’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대필자는 향리 출신의 문장가였으며, 발각된 후 양자 모두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3) 1807년 암기자료 반입 사건
조선 후기 어느 무과 시험에서, 한 응시자가 갑옷 속에 병법서를 수놓아 시험장에 들어간 사건이 보고되었다. 이 수법은 “옷에 글을 쓰면 안 된다”는 규정을 피하기 위해 자수를 이용한 방식으로, 사헌부에서 ‘전례 없는 정교한 부정’이라며 강하게 처벌을 요청했다.
4. 조선 정부의 대응과 처벌
조선은 과거 시험의 공정성을 중시했기 때문에,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게 대응했다.
(1) 형량과 처벌 규정
- 당사자: 장형(杖刑) 80~100대, 과거 응시 금지, 유배
- 공범: 시험관이나 문제 유출자에겐 파직, 삭탈관직, 심하면 사형까지 가능
- 대필자: 사서삼경에 능통한 인재가 대필자로 연루되었을 경우 문벌 추방 조치까지 취해졌다.
(2) 제도 개선 노력
정조는 과거 제도에서의 부정을 우려해,
- 답안 작성 시 실명 기재 금지
- 시험 전 일주일 간 격리 수용 후 시험장 입장
- 시험 감독관 교체 주기 단축 등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신분과 연줄, 권력 구조가 부정행위를 은폐하거나 방조하는 구조였기에, 이러한 시도는 부분적인 성과에 그쳤다.
결론
조선의 과거 시험은 이상적으로는 공정한 인재 선발 시스템이었지만, 현실 속에서는 다양한 커닝과 부정행위의 시도들이 존재했다. 그 배경에는 출세를 향한 욕망, 시험 제도의 맹점, 권력과의 유착, 정보 접근의 불균형이 놓여 있었다. 커닝은 단지 개인의 부정행위가 아니라, 당시 조선 사회의 구조적 병리와 계급 간 긴장을 반영한 행위였다. 정부는 반복적으로 제도를 개선하고 처벌을 강화했지만, 과거제도의 폐지는 결국 시대의 흐름 속에서만 가능했다. 조선의 시험 부정 사례는 오늘날의 입시 문제와도 궤를 같이하며,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상이 얼마나 실현되기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거울이다.